■ 외환위기와 도덕적해이

도덕적해이란?
도덕적 해이는 보험을 생각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우리는 평소에 불조심을 합니다. 하지만 화재보험에 가입하고부터는 화재에 대해 크게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물론 전혀 걱정을 하지 않는다고는 할 수 없지만 솔직히 옛날만큼 신경을 쓰지 않는 것은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화재로 집이 홀딱 타더라도 크게 걱정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보험금으로 새집을 지으면 되니까요. 이것을 가리켜 어려운 말로 도덕적 해이라합니다. 법적으로는 크게 문제가 없지만 도덕적으로 정신이 해이해진다는 뜻이죠.

외환위기의 원인 중 하나로 지적되는 도덕적 해이도 같은 맥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외환위기와 도덕적해이
대출에 대해 한번 생각해봅시다. 돈을 빌려줄 때는 항상 조심 또 조심해야 합니다. 돈을 빌려 간 사람이 언제 떼어먹고 잠수를 탈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만약 돈을 빌려간 사람이 잠수를 타더라도 누군가가 그 돈을 메꾸어줄 거라는 확신이 든다면 사정이 달라집니다. 더욱이 과거에 정부가 나서서 진짜로 돈을 메꾸어준 적이 있다면 굳이 몸조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따라서 운이 나쁘면 돈을 떼어 먹힐지도 모른다는 근심걱정 없이 돈을 막 빌려줍니다.

실제로 경제개발 초기단계에 있는 나라에서는 이런 식으로 대출이 많이 이루어집니다. 엄격하고, 까다로운 대출심사는 교과서에서나 나오는 일일 뿐입니다. 현실에서는 정부가 시키는 대로 대출을 해줍니다. 설사 대출해간 기업이 망해도 정부에서 메꾸어줄 것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에 크게 걱정을 하지 않습니다. 도덕적으로 정신이 해이해지는 것이죠.

외국의 빚쟁이도 마찬가지입니다. 수많은 기업과 은행에 마구잡이로 대출을 해줍니다. 이들이 돈을 떼어먹더라도 해당 국가의 정부가 나서서 메꾸어줄 것이라 믿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만약 이런저런 정치적인 이유로 정부에서 메꾸어줄 수 없게 되면 이때부터 문제가 발생합니다. 온갖 기업이 돈을 갚지 못해 허둥거리고 있다면, 그리고 돈을 떼어먹힌 은행이 생사의 기로에서 헐레벌떡거리고 있다면 외국인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당연히 최대한 빠른 시간 내에 빌려준 돈을 회수해 자기나라로 돌아가야 합니다. 괜히 망설이다 다른 사람들이 먼저 돈을 회수해서 떠나면 한 푼도 건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과정에서 외국인들은 빚 갚으라고 날이면 날마다 전화를 합니다. 따라서 은행과 기업은 달러를 구하느라 발버둥을 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환율이 상승하면서 외환위기가 찾아오게 됩니다. 결론적으로 말해 돈을 빌려줄 때 미리미리 까다롭게 심사를 했더라면 일어나지도 않았을 외환위기가 도덕적으로 정신이 해이해지면서 발생하게 된 것입니다.

도덕적해이모형으로 본 한국의 외환위기
지난 1997년 우리나라는 외환위기를 겪었습니다. 우리나라가 외환위기를 겪은 원인에 대해서는 여러가기 방법으로 설명이 가능 하지만, ‘도덕적해이 모형'으로도 설명할 수 있습니다.

당시 일부 금융기관은 대출심사를 까다롭게 하지 않았고, 기업은 그 돈으로 열심히 투자를 했습니다. 그런데 세계경제가 생각만큼 호락호락하지 않았고, 덕분에 수출이 죽을 쒔습니다. 새로 건설한 공장에서 물건은 쏟아져 나오는데 팔리지는 않으니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었죠. 결국 이 위기를 버티지 못하고 몇몇 큰 기업이 쓰러졌습니다. 그리고 수출이 되지 않으니 경상수지 적자는 점점 커집니다.

이 모습을 보면서 외국의 빚쟁이들이 ‘허허~’ 걱정을 하고 있는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동남아시아가 외환위기를 겪습니다. 이때 외국인들은 한국도 위기에 빠질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휩싸입니다. 외국인의 눈에는 대한민국도 아시아의 작은 나라일 뿐이니까요. 불안감이 엄습하자 외국인들은 빚을 갚으라고 전화를 넣기 시작했고, 마침내 환율이 폭등했습니다.

물론 이때 우리나라에 꼬불쳐둔 달러가 많았다면 그까이 것 하고, 갚아버리면 그만입니다. 하지만 당시 우리나라 금융기관은 단기로 달러를 빌려 장기로 대출을 하고 있었습니다. 즉 당장 갚을 돈이 오늘내일 하는데, 빌려준 돈을 받으려면 몇 년을 기다려야 하는 상황이었죠.

그렇다고 비상구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한국경제의 마지막 보루. 한국은행 창고에 달러가 많았다면 사태가 달라질 수도 있었습니다. 한국은행이 달러를 풀고, 그 돈으로 빚을 갚으면 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당시 한국은행 창고엔 달러가 거의 바닥나 있었습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결국 IMF에 구원요청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